1.
너무 많이 들어서 공중파 예능에 나오는 철 지난 유행어만큼이나 고리타분하게 느껴지는 말이 있다. 직장 생활을 계속하게 만드는 힘은 은행 대출이라고. 올해 상반기, 인생 최초로 대출을 끼고 이사를 하며 나 역시 어른의 세계로 한 걸음을 더 내딛게 됐다. 엑셀과 GPT를 번갈아 잡도리하며 원금 상환 시뮬레이션을 돌리고, 부동산 발품을 팔고, 처음 보는 수많은 용어와 서류 앞에서 땀을 삐질삐질 흘리고, 급기야 시도 때도 없이 전화받으러 나가는 바람에 이직 준비하는 거 아니냐고 의심을 사고 나서야 겨우 이사를 마쳤다. 번아웃 비슷한 게 온 것도 같았지만 한편으론 개운했다. 이제 정말 끝이구나!
2.
끝은 무슨, 이제부터가 시작이다. 첫 달의 원금과 이자가 나가기 전날에는 통장 잔액을 2번이나 확인했다. 살면서 각종 요금이나 세금 등을 안 내본 것도 아닌데 ‘주택담보대출’이라는 글자는 어딘가 그 무게감이 달랐다. 자칫 까먹고 기한을 넘기면 집에 빨간딱지가 나부낄 것만 같다.
3.
아침에 알람을 끄려고 휴대폰을 열었다가 눈을 의심했다. 돈이 벌써 빠져나갔다. 아니 그러니까 이렇게까지 이른 시간에? 나는 [오전 06:15 출금 완료]라는 알림을 ’돈을 제때 갚지 않으면 험한 일이 벌어질 것‘이라는 경고 메시지로 치환해 읽어 버렸다. 예로부터 빚쟁이들은 동트는 새벽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돈 빌린 자의 대문을 두드리는 법이다. 지금은 21세기이기에 그 방식이 모바일 친화적으로 바뀌었을 뿐.
4.
대출이 직장 생활을 계속 버티게 만드는 힘이 되어 주는지는 잘 모르겠다. 오히려 만사에 무던해졌다(안 좋은 예시: 내 대출 갚아줄 거 아니면 조용히 해…). 그러나 예전보다 월급이 소중해지긴 했다. 8년 차 직장인의 타성에 젖어 열어보지도 않던 급여 명세표의 세금 내역을 요즘은 굳이 자세히 훑어본다. 이상하게 아침에 눈도 일찍 떠진다. 부지런한 인간이 되고 싶은 사람은 빚을 져보기를 추천한다. 왠지 이렇게 누워만 있으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자주 들기 때문에…